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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지혜,달인]/생활종합운동[탁구]

정대세의 눈물/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6. 17.

국가와 함께 흐르는 정대세 눈물

영상을 올린 날짜
2010.06.16 03:33
정대세의 눈물 / 선우정
 
 
선우정 도쿄특파원
 
 
성악가 김영길은 '나가타 겐지로'란 이름으로 일본이 인정하던 스타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도, 한국도 조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조국은 북한이었다. 김영길은 뱃길이 열리자 주저없이 북송선에 올랐다. 항구에 몰린 팬들에게 그는 당차게 말했다. "이제 나가타 겐지로는 사요나라." 오솔레미오와 아리랑을 번갈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던 청진항에 도착했다. 먼저 조국에 건너간 벗 최승희(안무가)가 눈물로 그를 맞았다. 얼마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축하공연 무대에서 김일성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베이징 공연 때 환영해준 사람은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하지만 그의 소식은 7년 만에 그 '조국'에서 사라졌다.

김영길의 화려한 북한행에 수많은 청년 재일동포가 영향을 받았다. 국립 도호쿠(東北)대 대학원에 다니던 한국 국적의 수재 조호평도 그랬다. 그는 김영길 귀국 후 2년 만에 일본인 아내의 손을 잡고 북송선을 탔다. 아버지가 식칼을 들고 말렸지만 허사였다. 조호평의 소식은 5년 후 끊어졌다. 그의 안부가 확인된 것은 28년 뒤였다. 국제인권단체의 문의에 북한이 이례적으로 답한 것이다. 간첩 혐의로 끌려간 강제수용소에서 가족과 함께 탈주하다 총살됐다고 했다. 일본인 아내, 어린 자녀 3명 모두 조호평의 '조국'에서 그렇게 죽었다.

여성성악가 전월선의 부모는 아들 4형제를 북한에 보냈다. 경상남도 출신이었지만 북한을 조국으로 택했다. 전월선의 남자 형제들이 소식을 끊은 것은 10년 후였다. 그 후 10년 동안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조총련에 사정해 북한을 찾았다. 뼈만 남은 3형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들은 몸을 떨며 속삭였다. "간첩 누명을 쓰고 9년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고, "둘째는 고문을 못 이기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숨진 아들은 유골도 찾지 못했다.

작년 12월
오사카에서 만난 북송 탈북자 고정미는 "청진항에 도착한 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울던 오빠가 항구에서 바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유골도 없이 사망통지서 한 장만 날아온 것은 8년 후였다. 속병이 든 아버지는 숨을 거둘 때 "내가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이다.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로 북송사업에 참여해 동포 수만 명을 보낸 뒤 스스로 북한을 향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한을 향한 재일동포는 9만3340명. 수많은 북송 재일동포들은 생사 여부조차 알리지 못하고 '조국'의 수용소에서 사라져 갔다.

며칠 전 일본 TV아사히가
정대세에게 물었다. "일본에 살면서, 국적은 한국이면서, 왜 북한 축구팀을 택했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조국이니까." 어머니는 브라질전이 끝난 뒤 "오늘의 건투로 북조선에 대한 세계의 이미지도 달라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반세기 전 재일동포 9만명이 정대세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용기 있게 '조국'으로 가는 북송선을 탔다. 만약 정대세가 그때 북송선을 탔었다면 어떤 운명이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브라질전(戰)에 앞서 정대세가 흘린 눈물을 북에서 죽어간 재일교포들이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눈물에 감동하는 듯한 요즘 한국 일각의 분위기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