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51) 충북 영동 갈기산
[서울신문] 갈기산(585m)은 충북의 숨은 보석이다. 인근 천태산에 가려 찾는 이 뜸해 호젓하고, 짧지만 옹골찬 암릉을 품어 풍광이 수려하다. 금강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덕에 시종일관 금강의 유장한 흐름을 볼 수 있고, 멀리 내다보면 천태산, 운장산, 덕유산 등의 산그리메가 펼쳐져 마치 강원도 깊은 산에 들어온 느낌이다. 산행 중 예상하지 못한 빼어남에 수시로 놀라고, 산행 후 이곳 별미인 어죽을 맛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전북 장수의 신무산(898m)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진안과 무주를 지나면서 자유분방한 곡선을 유감없이 그린다. 이를 감입곡류(嵌入曲流)라 부르는데, 하천이 산지나 고원지대를 흐를 때 침식을 받아 깊은 골짜기를 이루면서 뱀처럼 휘어도는 것을 말한다. 감입곡류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을 지나며 수려한 발자국을 남기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양산팔경이라 부른다. 양산팔경은 영국사, 비봉산(482m), 강선대, 용암 등의 8곳의 명소를 일컫는다.
●역사의 아픔 서린 '양산 덜게기'
양산팔경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비봉산 옆으로 웅장한 산세와 정상부의 수려한 암봉이 눈길을 끄는 갈기산이 보인다. 갈기산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간한 지도에도 이름이 없다. 하지만 주민들은 산 정상 부근의 암봉이 마치 말의 갈기처럼 수려하다 해서 갈기산이라 부른다.
갈기산의 산세는 이웃한 월영산(529m)과 함께 반원을 그리고 있다. 산행은 월영산까지 종주할 수 있지만, 능선을 타고 갈기산에 올랐다가 소골 계곡으로 내려와 원점 회귀하는 코스가 좋다. 이 길은 약 4㎞, 3시간쯤 걸린다. 68번 지방도에 있는 가선리 바깥모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갈기산 등산 안내도와 등산로가 보인다. 능선으로 난 길을 따르며 산행이 시작되는데, 초장부터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15분쯤 오르면 오른쪽으로 눈을 뒤집어쓴 월영산이 제법 웅장하고, 뒤를 돌아보면 얼어붙은 옥빛 금강이 슬쩍 보인다.
고도를 높일수록 금강은 유장한 곡선을 그리고, 곧이어 설악산 흔들바위 같은 둥근 바위와 나무 한 그루가 잘 어울린 전망대와 만난다. 이곳이 이번 산행을 통틀어 금강 풍광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금산에서 흘러와 갈기산 발목을 적시고, 양산팔경이 있는 송호리 방향으로 흘러가는 금강의 곡선은 참으로 아름답다. 강물처럼 아름다운 곡선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도시에서 수시로 접하는 직선에 몸과 마음이 베인 탓이다.
갈기산에서 금강으로 이어진 산비탈은 까마득한 벼랑인데, 이곳을 양산 사람들은 '양산 덜게기'라 부른다. '덜게기'는 바위나 절벽을 일컫는 이 지역 사투리다. 이곳에는 1593년 임진왜란 때에 있었던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갈기산 아래 금강 줄기는 영남과 호남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왜군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다. 따라서 왜군의 금산 진입을 막으려는 조헌의 의병들에게 이곳은 천혜의 요새였고, 왜군에게는 죽음의 길목이었다.
당시 조헌의 의병과 합류했던 승병대장 영규대사는 양산 덜게기 바위벼랑 위에 돌을 쌓아 놓고 기다리다 적이 이곳을 지날 때 돌을 허물어뜨리면 능히 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헌은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며 영규대사의 계책을 쓰지 않고 이곳을 지나는 왜군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왜군은 이곳을 무사하게 지나자 너무나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말갈기 능선 타는 재미 쏠쏠
전망대에서 비탈을 15분쯤 가면 거대한 바위봉 갈기산 정상에 올라붙는다. 사방이 시원하게 뚫리는데, 북쪽으로 강 건너 천태산과 마니산이 어깨동무하고 있다. 그 서쪽 멀리 충청도 최고봉 서대산(903.7m)이 도도하게 솟았고, 남쪽으로는 산국(山國) 무주의 높고 낮은 산이 첩첩 산그리메를 이룬다. 600m가 안 되는 산에서 나올 수 있는 풍경이라고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정도다. 날이 좋으면 덕유산과 민주지산, 운장산도 잘 보인다.
갈기산에서 차갑재까지 이어진 암릉을 말갈기능선이라 부른다. 능선 타는 재미가 쏠쏠한 길이다. 주변 풍광도 빼어나고 겨울철에도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크게 위험하지 않다. 작은 봉우리를 넘다 뒤를 돌아보니, 갈기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암릉이 이름처럼 말갈기를 연상시킨다. 이어 제법 큰 봉우리를 넘으면 차갑재다. 갈기산과 월영산의 중간쯤 되는 곳이다. 여기서 북쪽 소골로 내려서게 된다. 수량이 적은 것이 흠이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소골에 내려서면 주차장에 닿는다. 산행은 끝났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고, 좋은 산을 만났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글 사진 mtswamp@naver.com
> > > 가는 길과 맛집
대중교통은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대전~통영고속도로 금산나들목으로 나온다. 68번 지방도를 타고 양산 방향으로 15분쯤 가면 어죽 식당이 많은 가선리를 지나 바깥모리 주차장에 이른다. 충북 영동은 금강의 싱싱한 민물고기를 이용한 어죽이 별미다. 가선리 선희식당(043-745-9450)은 커다란 냄비에 쌀·국수·수제비를 넣고 푸짐하게 끊여준다. 바다새우보다 고소하고 진한 맛이 나는 민물새우튀김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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