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47) 소백산 연화봉~국망봉 능선
[서울신문] "당연히 소백산이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 하나 꼽아달라는 질문에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다. 소백산(1439.5m)은 이름에 소(小)자가 들어가는 바람에 왠지 작고 만만한 산으로 느껴지지만, 품이 넓고 큰 산이다. 특히 1300~1400m 높이의 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로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여인의 몸처럼 부드러운 초원에는 봄·여름·가을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고,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여 환상적인 설경을 연출한다.
●신령스러운 산에 백(白)자를 넣어
소백산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소(小)가 아니라 백(白)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밝음(白)'을 숭상했기에 신령스러운 산에 백(白)자를 넣었다. 백두대간의 시원 백두산을 비롯해 함백산·태백산·소백산 등이 그렇다. 여기서 백(白)은 밝음의 뜻만이 아니라 '높음' '거룩함'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백산의 산세는 부드럽고 온화해 사람들이 살기 좋았다. 조선후기 유행했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풍기·춘양·영월·태백 등 많은 십승지가 유독 소백과 태백의 양백지간에 걸쳐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백산의 핵심은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연화봉~비로봉~국망봉 능선이다. 이곳을 계절과 산행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해 산행 코스를 잡는 것이 현명하다. 늦가을에 적당한 코스는 풍기의 희방사를 들머리로 연화봉과 비로봉을 거쳐 비로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거리는 약 11㎞, 5시간쯤 걸린다.
희방사 들머리는 소백산 등산로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야만 연화봉에서 시작하는 초원 능선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죽령에서 시작해도 연화봉에 닿지만, 포장도로가 깔려 걷는 맛이 좋지 않다. 주차장에서 희방사까지는 호젓한 길이 이어진다. 절 입구에는 수직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희방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그 모습을 서거정(1420~1488)은 '하늘이 내려준 꿈에서 노니는 듯한 풍경'이라 평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나 보다.
●여인의 몸처럼 부드러운 천상의 길
폭포를 지나면 아담한 희방사가 나온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대사가 호랑이가 물어온 경주 호장의 딸을 살려주고, 그에 대한 보은으로 시주받아 창건한 사찰이라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에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붙여 희방사가 되었다.
희방사를 나오면 본격적으로 산길이 이어진다. 피나무가 유독 많은 가파른 비탈을 30분쯤 오르면 희방 깔딱재에 올라선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활엽수들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난다. 멀리 소백산 천문대를 바라보며 1시간 가량 오르면 연화봉에 닿는다. 나무 데크로 말끔하게 꾸민 연화봉 전망대에 서면 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진 초원 능선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리나라 어느 능선이 이곳처럼 부드러울까. 반대편으로는 소백산 천문대 너머로 월악산 영봉이 엄지손가락처럼 튀어나왔다. 전망대 앞에는 빨간 우체통이 서 있다. 다음번에는 편지와 우표를 준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리라. 부드러운 초원 능선을 바라보면서 글을 쓰면 멋진 문장이 술술 나올 것 같다.
●남사고가 말에서 내려 절을 한 까닭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여러 봉우리를 넘는데, 나무들이 드물어 조망이 좋다. 능선의 초지는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었다가 이제 황금빛으로 넘실거린다. 곧 포근한 눈송이들에 덮여 겨울을 날 것이다. 제1연화봉에서 봉우리 두 개를 더 넘으면 천동계곡이 갈리는 삼거리다. 여기서 비로봉을 바라보면 드넓은 품 안에 주목들이 가득하다. 주목 군락지를 지나면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눈부시게 맑은 빛이 쏟아져 내린다.
소백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도인 남사고(1509~1571)다. 남사고는 십승지지를 체계화한 인물로 종6품 벼슬인 천문교수를 지내며 역학·풍수·천문에 능통했고, 조정의 동서분당(東西分黨)과 임진왜란 등을 예언했다고 한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 복을 듬뿍 주는 길지(吉地)를 말한다. 남사고는 십승지 중에서 가장 먼저 풍기 금계동을 꼽았다.
풍기가 십승지의 첫머리를 장식한 이유는 다름 아닌 소백산 때문이다. 말을 타고 풍기 언저리를 지나던 남사고가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저것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남사고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백산의 맑고 부드러운 초원 능선은 아니었을까.
하산은 비로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른다. 초반 가파른 비탈을 내려서면 전체적으로 완만한 길이다. 비로사까지 1시간 10분쯤 걸리고, 다시 30분 더 가면 삼가리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산행을 마치니, 내 안의 각지고 까칠한 생채기들이 소백산의 부드러움에 둥그렇게 구부러진 느낌이다.
글 사진 mtswamp@naver.com
● 가는 길과 맛집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주 혹은 풍기행 버스를 탄다. 영주행은 06:15~20:45 30분 간격. 풍기행은 07:30, 08:50, 11:10, 13:30, 15:40, 17:00에 있다. 영주에서 풍기 경유 희방사 입구행 버스는 06:15, 06:55, 07:50, 08:20, 09:20, 10:30, 11:50, 13:30, 14:30, 15:00, 16:30, 17:00, 18:30에 있다. 삼가리에서 풍기 경유 영주행 막차는 18:00다. 풍기는 인삼과 한우가 유명한 고장이다. 풍기인삼한우(054-635-9285)식당은 식육점을 같이 운영하면서 신선한 한우 생고기를 공급한다. 국물이 일품인 인삼갈비탕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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