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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조선 국왕들은 외국에 가봤을까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8. 4. 27.

[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조선 국왕들은 외국에 가봤을까

원칙적으로 먼거리 못다녀 27명 중 5명만 국경 넘어봐
모두 임금 되기 전의 일… 中 황제 만난 건 두명뿐

이한우

태조 3년(1394년) 11월 조선에서 올린 외교문서에 불경스러운 표현이 들어 있다는 명 태조 주원장의 트집을 무마하기 위해 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공 이방원이 명나라 금릉(지금의 남경)에 가야 했다. 이방원으로서는 1388년(고려 창왕 즉위년) 아버지 이성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이색의 '인질'이 되어 서장관으로 다녀온 지 6년 만의 두 번째 중국행이었다. 금릉으로 가는 도중에 이방원은 북경에서 얼마 후 명나라 제3대 황제에 오르게 될 연나라 왕을 만났다. 그가 바로 4년 후인 1392년 조카를 내몰고 황위를 차지하게 되는 영락제다. 조선 초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세종 2년~성종 19년)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두 잠룡(潛龍·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의 만남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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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태종이 경사(京師·명나라 수도 금릉)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영락제)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귀국하자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태조·주원장)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혜제)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고 하였다."

평소 '사람과 말을 고르는 눈은 고금의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이방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 500년 동안 명(明)이나 청(淸)의 황제를 대면했던 임금은 딱 두 명뿐이다. 태종과 인조다. 인조는 1637년(인조15년) 1월30일 삼전도에서 청 태종과 굴욕적 대면을 했다. 병자호란이었다. 물론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봉림대군(효종)도 이때 청 태종을 멀리서나마 지켜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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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에도 국가 최고지도자의 국제 감각은 필수적이다. 국제 감각과 관련해 눈길이 가는 대목은 월경(越境) 체험, 즉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다. 여기서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정확한 영토 감각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 27명 중에서 조선 반도 바깥으로 한번이라도 나가본 임금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이다. 물론 이들의 월경은 모두 임금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조선의 임금은 원칙적으로 국내에서조차 먼거리 여행이 금지돼 있었다.

태조는 이미 고려 때 장수로 명성을 날리며 여러 차례 압록강을 건너 요동정벌에 나선 바 있고 태종이나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묘하게도 조선 전기에 월경 체험이 있는 이들 3인 모두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은 부질없지만은 않다. 당시 심양과 북경을 오가며 급격하게 청나라에 밀려들던 서구 문물의 실상을 누구보다 상세하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감각을 가진 세자와 청나라의 은밀한 결탁 가능성에 대한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의구심 때문이었는지 소현세자는 불행하게도 의문사했다. 혹시 그들은 태종이나 세조의 사례를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죽은 소현세자 뒤를 아우 봉림대군이 이었다. 그도 청나라에서 8년간의 인질 생활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하지만 북벌의 결실은 전혀 얻어내지 못했다.

효종을 이은 현종은 조선 국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심양)에서 출생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임금으로 기록된다. 이런 가설이라도 만들어야 하는가? 능동적 월경(越境)은 강력한 권력 의지와 연결되어 왕권 장악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인질과 같은 수동적 월경은 복수심만을 불태우는 극단의 명분론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