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부여 마을 문화]<장암면/지토리편>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지토리(紙土里)
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사동천과 상하천 및 지토천 유역에 넓은 들이 조성되고 서남쪽으로는 성흥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악지대가 남쪽을 싸고 있는 지역에 지토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으로 부여와 임천을 잇는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갔던 길목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이었다. 옛 마을이 산재되어 있었으나 작은 마을이었던 이 지역에 조선시대 초기에 경주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차츰 개간해 나갔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마치 등성이에 불을 켠 것처럼 자리해 있다 해서 등애(燈涯), 조선시대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사창, 용들이 꼭 이마을 부근을 빙빙 돌고 승천하였다 하여 용왕골, 용왕곡, 산 모양이 삼태성처럼 생긴 삼태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태동, 옛날에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해서 지장골, 지장, 지장리라고 부르고, 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잣나무가 많으며 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잣티, 백티(栢峙)라 불리는 자연 마을들이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지)
「천방사 전설」
옛날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고자 할 때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왔다. 소정방이 군사들과 함께 금강(錦江)을 거슬러 사비성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는데,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금강 근처에서 머물렀다. 그때 한 도승이 근처를 지나가기에 소정방이 답답한 마음에 도승을 불러 방법을 물었다. 도승은 금강은 험하여 통과하기 어려운 곳이니 지나가기 위하여서는 텃세를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군대가 머물고 있는 산에 1,000칸의 집을 짓고 천일제를 지내야만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승의 말을 들은 소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1,000칸의 방이 있는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며칠 후 놀랍게도 풍랑이 가라앉았다. 소정방은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을 꺾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 후 소정방이 지었다는 1,000칸의 집은 절이 되어 ‘천방사’라 불리게 되었다. 절 뒤에 있는 산은 ‘천방산’이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