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 마을문화]<장암면/장하리편> 정찬응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6. 17. 11:06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장하리(長蝦里)
북고리  서부에서 유입 북동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수계와 서남쪽에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산세가 금강변까지 잇닿은 야산지대 동남쪽으로 금강과 골암천을 비롯한 여러 작은 냇물을 끼고 조성된 들을 낀 지역에 장하리는 자리한다.
인류의 정착은 상당히 빨라서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 이 곳에 자리한 사랑산성(沙浪山城)도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 구전에 전해오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금강 건너에 있는 석성 파진산에서 나당군과 싸운 백제군의 부상병들이 금강을 건너 사랑산성에 은거하였다가 둔병이 되어 백제 부흥을 외치며 살던 지역으로, 장정(長亭)지역이란 구전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백제의 부흥 운동과 연관이 되는 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 진주강씨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풍양조씨의 정착으로 넓은 들의 개간과 함께 풍요로운 고장이 형성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장정리, 후포리, 탑리, 하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정과 하곡의 이름을 따서 장하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백제 때 금강 내안에 있으면서 외성 역할을 한 사랑산성이 있고, 조선 영조 때 창건된 남산서원(南山書院)에는 조태징(趙泰徵), 조명규(趙明圭), 조주진(趙疇鎭) 3인이 배향되어 있고, 조선 선조 때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 낸 흥학당(興學堂)이 있으며 보물 제184호로 지정된 장하리 3층석탑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무가 길게 장사진을 이루어 운치좋은 마을이라 하는 장정마을, 한산사지가 있으며 3층석탑이 있다고 하여 탑리, 보물 제184호 부여장하리삼층석탑(扶餘長蝦里三層石塔)은 백제의 옛 땅이었던 충청, 전라도에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데 이 탑 역시 그런 계열에 속하는 탑이다.
땅 위에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基壇)을 만들었다. 탑신(塔身)은 네 귀퉁이에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긴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면에 감실모양이 있는데, 우주와 면석의 약화된 모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감실은 목탑에 많이 나타나던 것으로 불상을 모시는 방을 의미한다. 석탑에서는 대부분 이를 형상화하는데 그쳐 모양만을 새기는 정도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전체적으로 탑신의 몸돌이 높고 지붕돌은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방하였다고는 하지만 조형감각이나 수법에서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다. 1931년에 탑신 1층의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1962년 해체 수리시에는 2층에서 지름 7㎝, 깊이 12㎝로 사리를 두는 공간이 둥근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1931년과 1962년 수리하며 금제사리법과 상아불상과 그 안에 41개의 사리가 들어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옆 농가와 작은 민묘가 대웅전자리 인듯하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지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