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은산면/경둔리편>  정찬응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6. 17. 10:29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은산면 백제부흥군 주둔지 경둔리
북쪽에 낮은 산지가 있고, 상둔소류지와 안양골저수지가 있다. 대부분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있다.
경둔리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경둔천 근처는 산세가 수려하여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지가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계포란형을 비롯한 상제봉조형이 이곳에 자리한 구티 등의 명당설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여 오랫동안 나당군에 저항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경둔리는 왕흥사잠성과 연관된 부흥군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마을 유래는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는 둔터골과 지형이 병의 목과 같다는 병목안 등으로 불렸다가 후에 두터골로 전음된다.
그리고 산세가 비둘기 알을 품고 있는 형이라는 비지재, 정자나무와 맑은 샘이 있었다 하여 정수터로 불렸다는 설과,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부터 정수터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둔리, 하둔리, 내경리, 외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둔과 외경의 이름을 따서 경둔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비지재, 구티,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 하여 하둔리라고도 부른다.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던 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둔내동, 둔터골, 상둔리, 마을의 지형이 병의 목과 같이 생겼다 해서 병목안, 정자나무가 있고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 정수터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지 참고)

-백제부흥운동 삼국사기 해제-
무왕조카 복신 승려 도침 주류성 거점  반란 일본에 불모 부여풍을 왕으로세움 서북부 지역 호응 도성의 유인원 포위 당 조서내려 유인궤 검교대방주사자로 죽은 왕문도 군사 이끌고 신라군보내 유인원 구원
후 유인궤 신라군과 반격 복신 웅진강 목책안으로 후퇴 강다리가 좁아 1만명 전사 익사 함 복신 임존성으로 돌아감 신라군  군량미 떨어져 돌아감 스스로 도치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장장군이라 칭함  661년3윌이다
유인궤와 유인원 합세 신라 김춘추에게 표문 구원 김흠 지원군 고사에 이르자 복시에 요격 갈령도에서 도망 감히 출병 못함
얼마후 복신 도침 죽임 풍은 제사먄 주관 성에 고립된 유인원에게 위로하듯 언제 서쪽으로 언제 돌아가냐 전송해주겧다고 한다
서기 662년(신라 문무왕 2년, 당 고종 용삭 2년(서기 662) 7월,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킴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있으며 높고 험준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병사를 보태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병사를 독려하여 성곽에 가까이 접근해 날이 밝을 무렵에 성 안으로 들어가 8백 명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ㆍ청(靑)ㆍ내(萊)ㆍ해(海)의 병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임 부여풍이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병사를 막았다. 손인사가 도중에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사의 사기가 크게 올름 어떤 자가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이곳을 쳐야 합니다.”
유인궤는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병사들이 다칠 것이요, 밖에서 지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로써 무리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만약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덮고 바닷물도 붉게 되었다.
왕 부여풍은 몸을 피해 도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가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더불어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병사를 보내 이들을 공격했으나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상지가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때에 와서 모두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세워 보이라고 하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였다.
“야심이 있는 자는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무기와 곡식을 제공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궤가 말하였다.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성심과 꾀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 땅에 주둔하며 병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고 전쟁의 여파로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을 묻게 하고 호구를 등록 촌락을 정리 관리들 임명 도로를 개통 교량 제방을 수리 저수지를 복구 농업을 장려 농사와 양잠을 권장 가난한 자를 구제 고아와 노인을 보살핌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각기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백제의 유민을 불러 모음.
서기 665년(신라 문무왕 5년, 당 고종 인덕(麟德) 2년(서기 665) 부여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 유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본기』에 실려 있다.
유인원 등이 귀국 부여융은 병사가 흩어질까 두려워 당나라 서울로 돌아감 당 의봉(儀鳳) 년간(서기 676~8)에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해져서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다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ㆍ발해ㆍ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