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오수리><백강전투>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오수리> <백강전투>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하얀모래 백사장의 강가 백강 오수리
규암면 북쪽에 산악지대를 이룬 그 한복판에 위치해서 대부분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북동쪽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금강이 굽이쳐 지나가고 있고 남쪽으로 길게 들을 조성한 지역에 위치한다.
마을 남쪽에는 백제시대 삼산중 하나인 북쪽에서 떠 내려 왔다는 부산(浮山)이 있고 동남쪽에는 넓은 들과 강건너 부소산과 구드래가 한눈에 보여 전망 아주 좋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통일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으며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부락의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오수리의 남쪽은 금강이 범람할 때 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었던 지역이며 오수리의 남쪽 깊숙한 곳까지 물이 들어와 백사장을 이루는 듯하여 드넓은 백사장은 마치 하얀모래가 강과 함께 어우러져 백강이라는 마을로 현재 백강 초등학교가 소재되었다.
모래의 사질의 땅으로 농경지로는 부적당한 지역이었으나 제방공사로 현재 은산과 규암면 진변리을 이은 평야를 이뤄져 곡창지대로 변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가
조선말기에 현이 군으로 바뀌며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군통폐합에 의하여 오곡리(午谷里), 신리(新里), 수원리(水原里), 진변리(津邊里)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오곡리와 수원리의 이름의 글자를 따서 오수리라 칭하여 규암면에 편입시켰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수원터, 오곡리(午谷里), 용추골의 자연부락과 지명이 있으며
백제가 망한 후 부흥군의 요청에 의해 일본 왜의 지원으로 백강(백촌강)전투의 비정의 장소이기도 하다.
백강전투(白江戰鬪)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대신들이 당으로 끌려가고 당군의 약탈로 인하여 백제의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군 지도자였던 복신은 당시 왜에 체류 중이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부흥군 지도자였던 귀실복신이 원병 요청과 함께 당시 왜국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왜는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실시했는데, 천왕 사이메이[齊明]가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텐지[天智]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 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하였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 663년 8월,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 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 협공으로 백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네 번 모두 대패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