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신리>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왕흥사의 신리
규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대부분 평탄한 지형으로 동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넓은 백사장이 있었던 곳으로 백강이라
불리었고 강 건너 부소산을 앞으로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낮은 야산 지다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넓은 들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통일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백제시대 궁중에서 창건한 왕흥사(王興寺)가 백마강을 끼고 있으며 왕과 왕족들이 국태민안을 위해 불공을 드리러 드나들던 지역이다. 또한 사료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도무재라는 울성산성(蔚城山城)에서 백제부흥군들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나당군에 저항하다가 그 해 11월 5일에 신라왕 무열왕(武烈王)이 이끄는 신라군과 접전 끝에 7일간 성을 사수하며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백제군의 처참했던 도무재성터가 이곳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공주 군에 속했었고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의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에 속했었다. 조선 말기에는 현이 군으로 바뀌며 부여군의 도성면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마을이 새로 생겨 새말 또는 신촌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군 통폐합에 의하여 신구암리(新九岩里)와 진변리(津邊里) 각 일부를 통합하여 신리라 칭하고 규암면에 편입시켰다. 유적으로는 왕흥사지(王興寺址), 신리고분군(新里古墳群), 청간사지(淸澗寺址), 도무재산성, 청용사(淸龍寺)가 있다.
왕흥사지(王興寺址)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창 건 되어 사찰로 2001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427호로 지정되어 신리 37-2번지 소재되었다 왕흥사지(王興寺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왕흥사는 600년 백제 법왕 혹은 무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국보「창왕 청동사리함 명문」에 의거하여 그 창건시기를 위덕왕 때인 577년(위덕왕 24)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이 30명을 출가시켜 왕흥사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물가에 있었던 이 절은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법왕은 자주 배를 타고 이 절에 들러 향불을 올렸다.
또, 절 앞 언덕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한 바위가 있는데, 백제왕이 절에 가서 예불드리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으며, 그때마다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자온대(自溫臺)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대찰의 면모를 유지하였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멸망 전에 이 절의 승려들은 큰 배 같은 것이 물을 따라서 절의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며, 660년(의자왕 20)의 멸망 후 이 절을 기점으로 해서 항거하던 백제 잔병이 무열왕에 의하여 7일 만에 700명이 사살되면서 절도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절터 앞에는 ‘쇠대박이’라고 불리는 논이 있다. 쇳대는 쇠로 된 당간(幢竿)을 뜻하고, 쇳대 박이는 철당간(鐵幢竿)이 세워져 있던 장소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청동제사리합 1, 은제사리호 1, 금제사리병 1 3점으로
국보 제327호로 2019.06.26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리 기이다.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위덕왕 24)에 제작한 사실을 알 수 있어 절대연대가 확실할 뿐 아니라『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문헌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해당 유물은 백제 사비시기 위덕왕(威德王)에 의해 제작된 왕실 공예품으로써 공예사적 가치가 높으며, 죽은 왕자를 위해 발원된 기년명(紀年銘) 사리장엄구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공예사적인 측면에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착한 기법과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단순하고 단아한 형태와 보주형(寶珠形) 꼭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문양 등을 통해 525년 조성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의 영향을 받아 7세기 전반 미륵사지 사리기에 조형적으로 영향을 끼친 6세기 후반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사유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절대 연대 및 백제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 제작 사리 기라는 희소성, 우리나라 공예 및 조형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청 참고-
「통샘 이야기」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통샘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옛날 부여군 규암면 신리는 호남에서 서울까지 왕래하는 길에 있었다. 호남에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 올라갈 때 지금의 규암면 신리에서 합정리, 금암리를 거쳐 청남면 증산리, 신화장터, 공주시 유구읍, 천안시를 지나 서울로 올라가고는 하였다. 신리에는 버드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이상하게 버드나무속에서 매번 물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서울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신리에 잠시 들러 버드나무에서 솟아난 물을 먹으며 쉬어 갔다. 버드나무에서 솟은 물은 어떠한 가뭄이나 기근이 있어도 마르지 않았는데, 기미년에 있었던 국가적인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솟아났다고 한다. 현재는 버드나무를 베어 내어 뿌리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뿌리 속에서도 여전히 물이 마르지 않고 나오고 있어 규암면 신리 일대는 물이 좋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