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저석리> 정찬응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저석리>
정찬응
사) 백제예술문화연구소
일일일사(一日一史)
마을유래로 본 부여 문화
석탄정터 저석리
대부분 지형이 평탄하며 북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금강이 흐른다.
백제 시대는 사비군, 통일신라시대 때는 부여군에 고려시대 한 때 공주 군에 속하였으며, 상당히 마을의 형성이 빠른 지역이다.
백제 이전의 취락 형성한 것으로 지적하며 마을의 형성은 부여에 백제가 환도하기 이전부터 하천을 이용한 산업의 발달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져 농경지가 조성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하며 부여군 몽도면 석탄리,저채리, 유촌리와 반탄면의 서원리를 병합하여 석탄과 저채의 이름을 따서 정하였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금강물이 버드랭이와 돌을 앞으로 굽이쳐 흘렀다 한다.
돌들은 돌여울의 준말로 고려말 충신 경주이 씨 석탄 이존오(李存吾)가 귀양을 와서 살던 곳으로 그의 호 석탄(石灘)은 돌여울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지었다 하며, 당시 그가 살던 강 건너 왕지와 연결하는 청강나루와 석탄정터가 전한다.
저석 3리는 조선 때 공주 군에 속했다가 1914년 부여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중엽에 평택임 씨와 담양전 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뒷산에 산신당을 짓고 당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매년 음력 정월 망일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낸 미역을 부녀자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간소하나마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망루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버드랭이, 마을 주변에 당나무가 많이 있어 저채뜸, 저채, 저동(楮洞), 저채리(楮菜里) 등의 마을들이 있다.
또한 인조(仁祖) 7년(1629년)에 창건된 창강서원(滄江書院)이 있으며 추포(秋浦) 황신(黃愼)을 제사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1940년대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왕진(지) 장터가 있다.
분강 저석유적과 저석리고분이 있다.
분강 저석유적은 부여와 공주의 경계로 선사 청동기와 고대초기 국가 시대, 삼국 시대의 유적이다
또 저석리 고분(楮石里 古墳)은 서원부락 가장골의 산 6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 고분군이다. 이곳 부근에서는 백제시대의 요지도 발견된 바 있다. 벽돌덧널무덤(塼槨墓)을 비롯한 백제고분 10기를 발굴하였다. 1호는 벽돌덧널무덤이고, 2호는 앞 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었으며, 3호와 4호는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이었다. 그리고 5호는 돌덧널독널무덤(石槨甕棺墓)였다. 나머지의 고분들은 형태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저석리의 고분들은 파괴가 심한 편이나 그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2호분에서는 세발토기(三足器)가 출토되었는데 그 형식상 6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5호의 독널로 사용된 토기는 4세기 이후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저석리의 고분들은 그 중심연대가 5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참고문헌>
扶餘 楮石里古墳群(扶餘文化財硏究所, 學術硏究叢書 3,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