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큰샘마을 정동리>정찬응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큰샘마을 정동리> <사비기와 이야기>
사) 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큰샘마을 정동리
북서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금강이 흐르며 마을 대부분 평탄한 지대로
백제 때는 사비군, 신라 때는 부여군, 고려시대는 공주 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의 몽도면(蒙道面)이었으며 조선말에는 부여군의 몽도면 지역으로 마을에 큰 샘이 있었다 하여 샘골 또는 정동(井洞)이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의 개혁하며 몽도면의 정동리와 소룡리의 일부 및 현내면의 북포리 일부를 합병해 정동리라 하였으며, 정동과 와봉 2개의 행정리로 구분 정동 1, 2리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정동 1리에는 마을의 안에 큰 샘이 있어 샘골이라 하였고 지금도 샴골이라면 통하고 있다.
정동 2리는 백제시대 때 기와를 구웠다 하여 어얏골[瓦峰]이라고 하였으며 규암면의 호암리로 가는 범바위 나루와 청남면의 왕진리로 가던 독정이 나루가 있었으며 버스 교통의 발달로 지금은 없어졌다.
정동 1리에 꿩바위가 있다
정동리고분군은 백제시대의 고분군으로 정동리 와요지(瓦窯址) 뒷산인 높이 120m의 주장산(主葬山) 남쪽 사면에 집중 분포한다. 이곳에는 주장산성 혹은 건물지, 와요지 등 많은 유적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어 다량의 고분이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지표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분 가운데 내부구조와 드러난 채로 방치된 고분은 2기이며 대부분이 파괴되어 함몰된 상태여서 고분 유구의 성격은 알 수 없다.
백제시대의 고분으로 문양전 조각과 괴석 4개가 길이로 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전은 무늬별로 구분해 보면 무문전, 연화문전, 연화사격문전, 대방명문 전, 중방명문 전 등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백제 무령왕릉과 그 인근 송산리 6호분을 쌓는 데 사용된 전돌(벽돌)은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는 분석결과가 제출됐다.
(사비기와 이야기)
백제기에 기와제작에 부여인근이 제일이었다.
기와 재료인 소지가 좋고 풍부하며 운반의 교통로가 좋은 강변이 원인인 듯하다.
백마강을 끼고 와요지가 현북리왕요지 정암리와요지 동남리와요지 쌍북리와요지 정동리와요지 왕진와요지 등이 발달 공주 익산까지 공급한 것이 인장와에서 나타난요.
사비백제 와요지는 모래가 적당히 섞인 점토의 소재가 좋아 백마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또 기와의 운송도 육로이동은 충격으로 파손염려가 있어 수상운송이 편리해 강변에 발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