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의 마을 문화] <관북리>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4. 17. 22:01

<찾아가는 부여의 마을 문화>
정찬응

사) 백제예술문화연구소(社団法人百済芸術文化研究所)
부여일일일사(扶餘一日一史)

<사비백제 왕궁 관북리>
부여의 주산(主山)으로 진산인 부소산 남쪽에 위치한다. 백제시대에는 왕궁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으로 관북리이다.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 홍문리, 흑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북리라 하였다.
관북리는 흑천(黑川) 마을 또는 학(鶴) 샘 마을로도 불린다.
큰 비가 오면 이상하게 검은 물이 흐르는 냇가 옆의 마을이라 흑천(黑川)으로 거무내라고 불렀다, 부소산 입구에 큰 샘이 있어 물이 좋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학생이라 부르며 마을도 학샘마을이라 부르는 자연마을이 있다.
특히 백제 사비시기 관북리 유적은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나성과 함께 다섯 곳은 백제 후기(475~660년)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지난 2015년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됐다.

《혈순당의 벽화 전설》
옛날 백제 시대 부여의 부소산(扶蘇山) 뒤쪽에 우애가 두터운 한 남매가 살고 있었다. 남매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에 생계를 유지하고자 누이는 들판에 나가 곡식을 가꾸었고, 남동생은 백마강(白馬江)에서 고기를 잡았다. 남동생이 고기잡이를 하며 한 젊은이와 친하게 지냈다. 남동생과의 인연으로 얼마 뒤 젊은이는 누이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젊은이는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꿈이 많은 인물이었으므로 넓은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누이와 약혼을 하고는 큰 고깃배를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젊은이는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오면 혼인을 하자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 버렸다. 누이는 내키지 않았으나 젊은이의 소원이라 하므로 군말 없이 젊은이를 떠나보내고 평상시와 같이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젊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젊은이와 함께 바다로 떠났던 선원에게 젊은이가 군산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누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며, 그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백마강에 뛰어내리고 말았다. 누이가 죽자 남동생도 슬픔이 너무 커서 부소산을 며칠 동안 헤매다 바위에 올라가 누이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에게 구출되어 죽지 못하였다. 남동생은 집에 돌아와 마루 벽에 누이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완성하여 누이가 살았을 때처럼 그림에게 말을 거니 조금씩 슬픔이 잊혀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사람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여 남동생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아침, 남동생은 일찍 쳐 놓은 그물을 보러 나가야 하므로 손님이 깨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손님은 해가 뜨자 일어나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마루에 그려진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손님은 그림이 정말 아름다워 한눈에 반하였다. 그래서 마치 살아 있는 여인에게 구애를 하듯이 지긋이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여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더니 마루가 진동하다 집이 흔들리고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깜짝 놀라 합장을 하고 잘못을 뉘우치자 그제야 집이 조용하여졌다. 이후 손님은 다시 근처를 지나는 길에 찾아와 남동생에게 그림의 내력을 들은 후 누이의 혼을 위한 진혼굿을 하여 주었다. 그러고는 남동생의 집에 ‘혈순당’이라는 현판을 걸어 주었다. 이듬해부터 혈순당에서는 매년 진혼굿이 베풀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혈순당에서 하는 굿의 이름을 ‘혈순당 당제’라고 불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