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때그때 생생화보]/풍양조씨이야기

풍양조씨 단박모임 저녁식사[20100901]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9. 1.

풍양조씨 종친 단박 모임 이모 저모

  *종친 어른 몇 명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부여군 장암면에 고향을 두고 계신 풍양 조씨 조현구 회장님의 초대로

   몇 몇 지인이 모여서 고향 이야기, 종친 이야기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한 잔 두 잔술에 취기를 올리면서 기분도 취했습니다.

   그렇게 취기를 올리시는 동안 해는 서산에 기울고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시간이 허락 된다면 밤을 새워 서라도 고향의 향수를 달래보련만. 세월의 야속한 마음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집니다.  

 

 

조성근 성균관 유도회 회장님, 조현구회장님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지금 만큼 만 건강 잘 지켜주세요."

 *조남춘 대부님, 조성정 풍양 조씨 대종회 총무 이사님

 *이야기 속의 이 모습 저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풍양조씨 [ ]

 

본관명 풍양(豊壤)
성씨명 조씨(趙氏)
본관소재지 경기도 남양주 (京畿道 南楊州 )
시조명 조맹(趙孟)

본관연혁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으로 원래 백제와 고구려에 속했을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렸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 포주(抱州: 抱川)에 이속되었다.

1427년(세종 9)에 다시 양주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에 양주군으로부터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하여 남양주시가 되었다.

성씨의 역사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 조맹(趙孟)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풍양조씨세보(豊壤趙氏世譜)》에 따르면 그의 원래 이름은 조암(趙巖)이며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壤縣: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사람으로 천마산(天摩山) 아래 은거해오다가

태조 왕건(王建)을 만나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에

 올라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출생지인 풍양(豊壤)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종파

시조 이후에 세계가 실전되어 천화사전직(天和寺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중조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분류되어 세계가 이어졌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전직공파(殿直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전직공파에 판관공파(判官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지평공파(砥平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한평군파(漢平君派),

 별검공파(別檢公派), 우후공파(虞侯公派), 증장령공파(贈掌令公派), 도사공파(都事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부장공파(部將公派)로, 평장공파에 증참판공파(贈參判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世弼)로 각각 나뉘어졌다.

주요세거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원
강원도 양구군 남면 죽리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전라북도 군산시 신관동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지토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상황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하황리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장월리
평안남도 용강군 양곡면 초축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풍양조씨

35,009가구 총 113,79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윤창현,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 (韓國地名沿革考)》 (권상로, 동국문화사, 1961)
《한국인의 성보(姓譜)》 (삼안문화사, 1986)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전통족보문화사(傳統族譜文化社)》 (http://www.genealogy.co.kr)

 

 

 

 

 

 

 

 

 

 

 

 

 

 

  풍양조씨(豊壤趙氏)  

 

 

 

□ 시조 : 조맹(趙孟)

 

시조 은 초명이 바위로서 신라 말에 풍양현의 천마산 아래 지맥인 독정산의 암굴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찾아가 장군을 삼았다.

 

당시 그는 70세였으나,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만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상주국삼광 문하시중평장사에 봉해 졌으며 '맹'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도 천마산 아래에 그가 태조 왕건을 처음 만났던 암굴이 남아 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고 매년 10월 세째주 일요일(원래는

 음력 9월 초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 가문

조맹 시조 이후, 중간 6세가 실전되어 지린을 1세조로 하는 전직공파와 몇 세가 실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혁을 1세조로 하는 평장공파로 대변된다.

 

(양파는 서로 촌수를 가릴 수가 없어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호군공파 ·회양공파 ·금주공파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 남원공파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 아래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 인물

회양공파는 나중에 한평군파와 청교파로 대별되는데, 회양공파에서는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한편, 남원공파 역시 ‘소론집’으로 상신 1명,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보면, 숙종 때의 우의정 상우, 영조 때의 좌의정 문명, 영조 때의 영의정 현명,

 영조 때의 우의정 재호 등이 회양공파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고 효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익,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복양은 남원공파이다.

 

또,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회양공파의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엄의 손자 만영이 문조(익종)의 국구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에는 병현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대표적 인물

명문 풍양조씨를 세도가문으로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된 인물들이 많다..

 

회양공파의 분파인 청교파에서 숙종 때의 우의정 상우, 영조 때의 좌의정 문명,

영조 때의 영의정 현명, 영조 때의 우의정 재호 등의 정승이 나왔고, 원명, 시준,

정진, 홍진, 상진, 병필, 병창 등의 판서급 인물들이 나왔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한

 회양공파의 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상경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엄의 손자 만영이 문조(익종)의 국구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도가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한평군파는 도정을 지낸 도보의 아들 상경, 상강, 상기 3형제와 8명의 손자가 모두

벼슬에 올라 영조와 정조조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남원공파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익이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복양은 현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복양의 아들 지겸은 숙종때 부제학을 지냈고,

형조 판서 만원과 함께 현종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조상우  :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냄

조문명  : 조선 영조때 좌의정

조현명 : 조선 영조때 영의정

조재호 : 우의정

조익  : 성리학자

조복양 : 현종 때 대제학

조엄 :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옴

조만영

조인영

 

109,433명. (1985년)

 

□ 후손들

현대에 와서 풍양조씨 종손들은「풍육회)」를 설립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화수회에서는 선조의 묘소 및 유적지 정화사업과 종보 빛 족보발간 등

 

다양한 사업목표를 설정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매년 여름 상주시 낙동면에 소재한

검간공 정 할아버지(호군공파,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 벼슬이 봉상시정(정3품)에 이르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됨)의 고택인 양진당에서

 

 뿌리교육을 하고 있으며 종친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 대종회 577-4281)

 

□ 유적지

견성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3번지 천마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개국 공신인 풍양조씨 시조 시중 조맹이 은거양덕하던 곳이라 한다.

그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짓고 견성암이라 하였으나 처음 창건한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고 대략 고려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서기 1860년(조선 철종 11년)에 조시중의 후손이며 스님인 빈월혜초가 법전과 우화루를

중수하고, 1882년(고종 19년)에 봉성화상이 중수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엣기록으로는 견성암중수기, 견성암우화루기, 견성암 중수부정화신성기 등이 있고,

 조시중이 수양할 때 마시던 우물이란 뜻으로 독정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아 인근 부락에서 가물 때는 음료수를 길어가기도 하는데 당사를

 [독정이 절]이라 하면 산하촌을 독정리라 부른다.

 

또한 조시중이 수양할 때 기거했다는 수양굴이 있고 지금도 조씨문중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죽으면 가지가 하나씩 말라 죽는다는 기념송(6.25때 포탄에 맞아 쓰러져

현재는 없음)이 있는데, 이는 조시중이 기념으로 직접 심은 것이라 한다.

 

 

풍양궁-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

대궐터에 있는 풍양궁의 터. 조선 제2대 정종 2년(1400) 11월에 왕이 왕위를 그 아우 태종에게

물려 주고, 이 곳에 와 있었다.

태종 2년(1402)에 태조가 사랑하는 세자 방석, 방번의 참변을 당하고 태종을 미워하여

함흥에 가 있다가 4년 만에 박순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곳에 머무르고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내각들이 와서 모시고 서울로 올라 왔으므로 더욱 유명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양조씨는 남한에 총 25,894가구,

109,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집성촌

경기도 김포군 월곷면 서암리

충남 논산군 성동면 개척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

충북 옥천군 미면 신광리

전남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경북 상주시 낙동면 일원(상주시 남장동에 풍양조씨 대종보를 모신 보각이 있으며, 대종손이 살고 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초유리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장월리

 

 

 

출처.... 배우리족보 닷컴